법치주의로 가는 길
‘배심 재판’ 받을 권리가 기본권 되려면

최근 ‘나꼼수’와 안도현 시인에 대한 선거법 사건의 국민참여재판(배심재판)에서 배심원들이 ‘감성변론’이나 ‘정치성향’에 휘둘렸다는 비판이 일었다. 정치적 맥락을 가진 사건이라면 사실 그런 비난은 직업법관도 마찬가지로 받을 수 있다. 재판의 숙명인 것이다. 그러니 배심재판 제도 자체가 유죄는 아니다.
1997년 봄 법원행정처에서 근무할 때, 미국 뉴욕카운티 지방법원 형사부지원을 방문하여 형사재판 운영 상황을 둘러본 적이 있다. 그 때 만난 지원장은 법관으로서 배심재판을 옹호한다고 했다.“배심재판을 함으로써 담당 법관에 대한 외부의 비난을 상쇄·완충할 수 있다.”상당한 법조 경력을 갖추고 존경을 받는 변호사 중에서 법관을 뽑는데다가 배심재판에서 유·무죄는 배심원들이 결정하니 법관은 재판을 잘못 했다고 비난 받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유명한 OJ 심슨 사건에서 형사재판은 무죄, 민사재판은 유죄였다. 그러나 그러한 평결(評決)을 내린 것이 배심원, 다시 말하면 ‘나의 이웃 주민’이기 때문에 담당 판사는 비난의 화살을 비껴갈 수 있었다.
원래 재판권은 주권자인 국민의 몫이다. 국민이 사법권을 판사에게 온전히 맡길 수도 있고 직접 참여할 수도 있다. 대한민국 60년이 되던 2008년부터 우리나라도 형사재판에서 배심재판을 시행하고 있다. 국민주권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사법권을 직업법관의 손에서 시민의 품으로 조금이나마 이동시킨 민주화의 쾌거가 아닐 수 없다. 국민이 유·무죄 판단과 양형 판단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국민과 법원 사이에 소통하는 통로가 마련되었고 재판절차의 투명성이 높아졌다. 사법의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재판에 대한 신뢰를 높이는 데 이바지하였다.
현재 배심원의 평결결과를 판사가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이른바 기속력(羈束力)은 인정되지 않지만, 배심재판 시행 6년이 되어 가면서 배심 평결과 판결의 일치율이 90%를 넘을 정도로 판사들은 배심원의 뜻을 사실상 존중하고 있다. 이는 놀라운 성과이다. 형사재판에 국민의 건전한 상식이 제대로 반영되고 있다는 의미이다. 국민 개개인의 역량과 양식이 이제 공동체의 여러 문제를 배심재판의 마당에서 감당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성숙하였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러나 어느 제도든 완전무결할 수는 없다. 시행 초기에 문제가 발생하면 보완하면서 발전시켜야 한다. 허위사실공표나 후보자비방과 같은 선거법 사건을 배심재판으로 하면 때로 정치적인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런 사건을 배심재판으로 할 것인지, 배심재판 신청에 대해 어떤 경우에 배제결정을 할 것인지에 관한 해석 기준이 재판부별로 달라서 자의적이 될 가능성이 높다면, 법령을 정비하여야 한다. 현행법의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하는 것이 적절하지 아니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와 같이, 추상적인 기준만 두면 결국 재판부의 재량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는 문제가 생긴다. 법령을 보다 정치(精緻)하게 정비하여야 한다. 현재 입법예고 중인 ‘국민의 형사재판 참여에 관한 법률’ 개정안에 배심재판 회부 기준을 보다 구체화하거나 대법원규칙에 위임하는 방안이 모색되어야 한다.
앞으로 배심재판이 확대됨에 따라 이제 배심재판에 참여하는 국민의 책임도 아울러 막중해졌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배심재판의 주인은 바로 나, 모든 국민이다. 국민들도 누구나 언제든지 배심재판을 능히 감당할 수 있도록 공동체의 제반 문제에 대해 평소에 고민하고 균형감각과 건전한 식견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배심원이 중심을 잡지 못한 채 감성변론에 휘둘린다거나, 정치성향을 벗어나지 못하고 지역정서에 함몰된다면, 재판권을 직업법관이 되가져 간다. 속임수 변론에 흔들리지 않는 판단력과 건전한 시민의식을 갖춘, 깨어 있는 시민만이 사법의 주권자가 될 수 있다.
배심재판의 역사가 일천한 탓도 있지만 그 동안 민주시민 교육을 소홀히 했다. 이제라도 어린 학생 때부터 나중에 배심재판을 감당할 만한 성숙한 민주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법 교육 내지 민주주의 교육을 내실화하여야 한다. 배심재판의 성공적인 정착을 위해 국회·대법원·법무부는 물론 교육계와 언론계도 함께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배심재판이야말로 ‘주권자인 국민의 정치생활의 근간을 뿌리부터 변혁하는 일’이다. 배심재판은 더욱 활성화시켜야 한다. 그래야 장기적으로 배심원의 평결에 법률상 기속력을 인정하는, 진정한 의미의 사법 민주화를 달성할 수 있게 된다. ‘배심재판을 받을 권리’가 헌법상 국민의 기본권으로 승격되느냐는 이제 우리 국민들에게 달려 있다. (중앙SUNDAY 2013. 11. 17.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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